《력사유적과 유물은 선조들이 어떤 문화를 창조하고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어떠한 길을 걸어 발전하여왔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실물자료입니다.》 (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나라에는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있다.
유구한 력사를 전하는 울릉도의 고인돌무덤도 그러한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들은 고대에 벌써 조선동해의 섬인 울릉도에 건너가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꾸리고 생활하였다.
울릉도에 생활터전을 마련한 우리 선조들은 고대 무덤형식의 하나인 고인돌무덤을 만들어썼다.
우리 선조들이 울릉도에 진출하여 고대무덤형식의 하나인 고인돌무덤을 만들어썼다는 력사기록은 18세기에 출판된《해동지도》와 1882년 리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에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18세기에 출판된 《해동지도》의 울릉도부분도에는 우리 선조들이 리용한 《석장》형식의 고인돌무덤 40여기가 표기되여있고 1882년에 울릉도를 답사한 리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에도 고인돌무덤과 관련한 기록이 명백히 서술되여있다.
《울릉도검찰일기》의 저자 리규원은 5월 2일 소황토구미에서 대황토구미로 가는 로상에서, 5월 3일 흑작지에서, 5월 4일 성인봉 등에서 《석장》의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써넣었다.
이 기록가운데서도 5월 2일에 서술된 기록은 《석장》의 형태를 생동하게 반영하고있는것으로 하여 매우 주목을 끈다.
이 자료에는 《5월 2일 소황토구미에서 신술방향(서북방향)으로 곡태령을 넘으면 대황토구미로 가는 길에 이른다. 길가에 널직한 돌이 놓여있는데 그 앞과 뒤 그리고 량옆에는 작은 돌이 널직한 돌을 받치고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래서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들이 옛날 <석장> 터의 흔적이라고 말하였다.》고 서술되여있다.
이 일기의 내용을 보면 《석장》이 고인돌무덤이라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다.
최근시기에 진행된 울릉도에 대한 조사 및 발굴은 《울릉도검찰일기》에 씌여있는 《석장》과 관련한 내용이 고인돌무덤을 반영한것임을 명백히 말해준다.
울릉도에 대한 조사 및 발굴에 의하면 울릉도의 저동리, 현포리, 남서리 등지에서 각각 1기씩의 고인돌무덤이 발견되였다.
발굴된 고인돌무덤들은 화강암으로 만든 뚜껑돌(길이 3 ~ 5m, 너비 3~4m 두께 1~2m)이 땅겉면에 드러나있고 뚜껑돌밑의 한쪽모서리에는 길이, 너비가 약 1m인 막돌 한개가 고여진 상태였다고 한다.
이 3기의 고인돌무덤가운데서 가장 큰것은 저동리에 있는 고인돌무덤인데 그 뚜껑돌은 길이 5m, 너비 4.2m로서 대형고인돌무덤에 해당된다.
울릉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무덤형식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서부일대의 여러 지역에 분포되여있는 고인돌무덤형식과 거의 같거나 류사하다는것이 확인되였다.
이것을 통해서도 우리 선조들은 고대시기로부터 륙지와 멀리 떨어진 울릉도와 그 주변의 일대를 개척하고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더우기 울릉도에서 발견된 대형의 고인돌무덤이 당시 지배계급을 이루고있던 통치층의 무덤이라고 볼 때 울릉도는 물론 그와 린접한 독도뿐아니라 그 주변의 바다수역이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통치령역안에 들어있었고 대대로 내려오면서 그에 대한 지배권이 행사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울릉도검찰일기》에 반영된 고인돌무덤을 통하여 울릉도와 그 주변섬들이 고대국가형성이후부터 우리의 령토이라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