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교수 박사 조용봉
2024.1.2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인민을 하늘처럼 믿고 끝없이 사랑하시였으며 언제나 인민의 요구와 리익을 첫자리에 놓으시고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하시였습니다.》
한평생 이민위천의 숭고한 리념을 지니시고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위인상을 보여주는 혁명일화들에는 인민을 위해 한생을 묵묵히 한 초소에서 일해온 한 평범한 리발사인 리규호아바이에게 베풀어주신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
일제식민지학정밑에서 온갖 구박과 천대를 받으며 먹고 살아가기 위해 리발기술을 배워 위대한 수령님 찾아주신 인민의 주인된 새세상에서 누가 보건 말건 인민을 위해 성실하게 복무하는 그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언제나 잊지 않고계시였다.
그러던 주체60(1971)년 9월 어느날 아침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몸소 리발소를 찾아오시여 여느날과 같이 아침 일찌기 나온 리발사에게 공훈리발사칭호를 수여받은데 대하여 축하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생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했지만 이 기쁜 날에 그들이 다 찾아와서 축하를 할수 없겠기에 자신께서 왔다고 하시면서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어정쩡해있는 그의 손을 꼭 잡으시고 거듭 축하하여주시였다.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리발사는 어떻게 자기의 격정을 말씀드렸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이의 자애로운 손길에 몸도 마음도 맡긴채 어깨를 들먹이였다. 크게 한 일도 없는 그에게 조선에서 첫 공훈리발사의 높은 영예를 안겨주도록 하시고는 바쁘신 일도 뒤로 미루시고 일부러 찾아오시여 아직 당사자도 모르는 경사를 그토록 기뻐하시며 축하하여주시니 그 고마운 은정을 무엇으로 다 헤아릴수 있겠는가.
이윽해서야 마음을 진정한 그는 그전 세월같으면 사람축에도 들지 못했을 리발사에게 그토록 높은 영예를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은덕에 오직 한마음 충성으로 보답할 결의를 다지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소박한 결의를 위대한 수령님께 그대로 보고드리겠다고 하시면서 당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그가 구두수리를 하건, 리발을 하건, 탄을 캐건, 무슨 일을 하든지 차별하지 않고 최상의 영예와 영광을 안겨준다고, 당을 위해 한생을 고스란히 바쳐온 동무와 같은 로동계급이야말로 진짜 공로자이라고 하시면서 나이는 비록 많지만 로동계급의 본분을 잊지 말고 앞으로도 오늘처럼 왕성한 기백을 가지고 일을 더 잘해서 당의 은덕에 꼭 보답하기를 바란다고 고무해주시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부르시여 옆에 있던 일군들에게 이 아바이가 바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공훈리발사칭호를 받은 리규호아바이라고 소개하시고나서 아바이를 오라고 한것은 다름아니라 사진을 함께 찍기 위해서였다고 하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위대한 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일생에 다시없는 최상의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은정과 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생을 리발로 당에 충실해온 공로있는 오랜 로동계급이라고 하시면서 한해두해 늙어가는데 더 늙기 전에 세상구경을 하라고 로동자대표단의 한 성원으로 외국려행까지 보내주시였으며 그후에는 리발사아바이는 일밖에 모르니 그의 자식들의 학부형구실은 우리가 할수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그의 자식들의 희망과 소질까지 하나하나 알아보시고 그들모두를 대학에 보내시여 어엿한 민족간부로 키워주시였다.
참으로 리발사로 일해온 그의 한생은 위대한 장군님의 한량없는 은정속에서 살며 일해온 참으로 보람차고 행복한 나날이였다.
그후에도 그는 몸은 비록 늙었어도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천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할 일념을 안고 자기의 초소를 굳건히 지켜 일하였다.
진정 절세위인들의 따사로운 사랑이 있어 조선에서는 평범한 근로자들이 공훈리발사, 공훈구두수리공, 공훈열관리공으로 보람차게 일하며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