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대일본에 미친 조선의 영향 (4)

 2016.7.25.

일본고분문화의 조선적성격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일본렬도에 적극 진출하여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정일전집》 제7권 164페지)

우리 선조들은 고대일본의 야요이문화뿐아니라 그에 뒤이어 일본렬도에서 창조된 고분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3세기말~4세기초경에 고분문화와 교체되였다.

고분문화는 일본렬도에서 3세기말~4세기초부터 무덤형식이 크게 변하면서 땅우에 무덤무지(봉분)가 솟아난 새로운 무덤(이것을 고분이라고 함)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고분문화시기는 7세기경까지 포괄하는데 대체로 고분의 발생, 발전, 쇠퇴에 따라 전기(4세기), 중기(5세기),후기(6~7세기)로 나눈다.

고분문화시기는 야요이문화시기부터 시작된 농업과 수공업이 철기의 광범한 보급과 농경지의 확대, 관개기술의 개선에 의해 한층 발전하고 각지의 지방호족들이 소국을 이루고 자기의 세력을 크게 확장한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 10여만개나 되는 크고작은 고분들과 거기서 나온 우수한 농구, 공구, 무기, 무장, 마구, 장식품 등 껴묻거리들에 여실히 반영되여있다.

그러면 3세기말~4세기초에 이러한 고분문화는 누구의 영향밑에 일본땅에 돌연히 나타났는가. 그것은 야요이문화의 전례로 미루어보나 당시의 고고학적자료와 력사기록으로 보나 고구려를 비롯한 조선의 세나라의 영향에 의한것이다.

기원전후한 시기 우리 나라에서는 수천년간 존재한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국가들이 무너지고 고구려를 비롯한 초기봉건국가들이 성립되는 사회적변혁이 일어났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사람들은 초기부터 높은 봉분을 쌓는 무덤을 써왔다. 고구려에서는 건국초기부터 돌로 무덤무지를 만들었고 그후에는 흙을 씌우는 봉분을 써왔는데 이것은 뒤이어 발생한 동족의 나라들에까지 미쳤던것이다.

한편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와 가야 사람들은 고대조선사람들의 뒤를 이어 대체로 기원초인 야요이문화기부터 일본렬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3세기중엽이후부터 본격화되였다.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에 선진문명의 보급자로서 큰 세력을 이루고 선도자, 정치적지휘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죽은 다음에는 그 지위에 맞게 고국에서처럼 높은 봉분을 가진 고분들에 묻혔고 살아있을때의 많은 물건들을 껴묻었다.

이리하여 일본에 새롭게 발생한 고분문화는 그 내용과 형식에서 조선적성격을 띠지 않을수 없었다.

고분문화의 조선적성격은 우선 고분들의 분포와 구조를 통해 알수 있다.

일본의 특대형고분들이 조선과 가까운 북규슈를 비롯한 일본서부지방에 집중분포되여있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고분의 길이가 수십~수백m나 되는 제일 큰것들이 집중되여있는 3대고분지역은 일본서부지방인 북규슈, 기비, 기나이 지방이다. 그리고 제일 이른 시기의 고분들은 북규슈지방에서 시작되였고 그것은 점차 규슈남부와 혼슈지방으로 퍼져나간것으로 되여있다.

일본의 고분들은 외형으로 보아 원분(둥근무덤), 방분(모난무덤), 전방후원분(앞이 모나고 뒤가 둥근무덤)으로 갈라볼수 있는데 이것들은 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국들에서 이미 쓰던 무덤형식들이다.

종전에 일본어용사가들이 일본고유의 무덤이라고 고집하던 전방후원분도 최근 조선의 영향밑에 이루어진 무덤이라는것이 명백해졌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아사히신붕》(1990년 3월 26일)은 《전방후원분의 <원류묘>가 조선에서 련속 발견》이라는 표제밑에 《일본독특의 분묘인 전방후원분을 꼭 닮은 돌로 쌓은 고분이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련속 발굴되고있다. …일본에서는 3세기중엽부터 축조되기 시작한것에 비하여 조선의것은 적어도 기원전후한 시기의것이기때문에 200~300년간 거슬러올라간다.》라고 론평하였다.

일본고분의 장법과 내부구조를 보아도 주검을 내려묻은 수혈식, 주검을 옆으로 묻는 횡혈식 그리고 주검칸을 돌로 만들고 흙으로 봉분을 한것 등은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먼저 쓴것으로서 그 영향을 받은것을 볼수 있다.

고분문화의 조선적성격은 또한 무덤에서 나온 껴묻거리들을 통해서 더욱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일본고분들에서는 쇠도끼, 쇠창, 창대패, 쇠가위 등 공구, 쇠보습, 쇠낫, 쇠가래, 쇠호미, 쇠괭이 등 농구, 쇠칼, 쇠검, 쇠창, 쇠활촉 등의 무기, 투구, 방패, 단갑(갑옷) 등 무장, 말안장, 행엽, 말자갈, 등자 등의 마구, 금동관, 금귀걸이, 청동띠고리, 금동신발, 각종 구슬과 거울 등 몸치레거리, 하지끼, 스에끼 등 그릇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물들은 고구려를 비롯한 세나라와 가야의 무덤들에서 나온것과 신통히 같거나 비슷하다. 이에 대하여서는 일본고고학계도 인정하고있다.

일본의 고분문화가 조선의 영향에 의해 생겨난것은 기록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당시 고분의 주인공은 그 축조기술과 능력, 껴묻기로 보아 그 지방의 정치적지휘자이거나 그러한 선진기술의 보급자들이였다. 그런데 《일본서기》등 기록들에는 고분문화시기 일본렬도에 건너가 선진문명을 보급하고 정치적지휘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조선계통문벌로 되여있다.

결국 일본의 고분문화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비롯한 중세초기 우리 나라의 영향밑에 발생, 발전하였던것이다. 이리하여 고분문화시기에 일본렬도에서는 농업과 수공업이 훨씬 발전하고 생산과 과학기술, 문화분야에서 큰 전진을 이룩하게 되였으며 일본의 력사발전을 추동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