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에 대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문학대학 박사 부교수 리진주
 2015.12.2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우리 나라의 력사와 민족문화유산에 대하여 옳은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김일성저작집》 제25권 23페지)

우리 민족이 이룩하여놓은 민족문화유산들가운데는 백과사전유산도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1589년에 권문해(1534-1591)가 우리 말과 력사, 지리, 민속, 생물을 비롯한 매우 넓은 분야의 지식과 사건들을 사전식으로 해설한 방대한 내용의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미 1894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조선서지》에서도 조선에 관한 모든것을 운의 순서에 따라 배렬한 백과사전이며 력사, 지리, 언어, 문학, 과학에 관하여 매우 흥미있는 지식을 알려주고있는 책으로 평가되였다.

이 책은 봉건시기 우리 나라의 력사와 문화연구에 필요한 많은 자료들을 제공해주고있으며 중세기에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백과사전적인 문헌으로서 적지 않은 문화사적가치를 가지는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1)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자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자는 권문해(權文海)이다.

권문해는 자를 호원(灝元), 호를 초간(草澗)이라고 한다.

그는 1534년(중종 29년) 7월 24일(음력. 이하 같음) 당시의 경상도 례천군 죽림리에서 권지(權祉)의 맏아들로 사림량반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성균관 진사 권오상(權五常)은 큰 할아버지 권오복(權五福)과 함께 기묘사화(1519년)에 련좌되여 강진에 정배살이를 갔다가 돌아와서 벼슬할 뜻을 버리고 은거하였던 인물이였다.

권문해는 어려서부터 자기 아버지로부터 가정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후 퇴계 리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더욱 힘썼다.

그는 1560년(명종 15년) 26살때에 별시병과(別試丙科)에 제8위로 합격하였으며 그후 곧 권지 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후 그는 주로 성균관 및 량사(조선봉건왕조 때 사헌부와 사간원을 두루 이르는 말ㅡ인용자)의 여러 벼슬자리와 지방관을 력임하면서 《정학창언 (正學唱言ㅡ바른 학문과 옳은 언론)》을 주장하였으며 《곡학아세(曲學阿世ㅡ바른 길에서 벗어난 그릇된 학문으로 세상사람에게 아부하는것)》와 정치도덕적인 온갖 비행을 반대하여나섰다.

그는 자신부터 우선 재물을 탐내지 않고 부정적현상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규탄하는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때문에 권문해에게는 때때로 화단이 돌아왔으나 그는 《본심을 속여 남을 리간한 일이 없는》 품성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권문해의 품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잘 말해주고있다.

그는 1582년(선조 15년)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을 때 《비록 임금이 신임하는 측근자와 왕실과 고락을 같이 하는 친분이라도》 꺼리지 않고 《폭로규탄하기를 어려워하지 않았으며》 경연강의에 나갔다가 임금앞에서 만호, 첨사들의 부당한 착취현상을 근절하여야만 유명무실해진 남방의 수군을 강화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초간선생문집》년보. 참고)

그는 이무렵 함경도일대에 침입하여 략탈을 일삼던 니탕개를 우두머리로 하는 녀진족침략자들을 격멸소탕하기 위한 싸움에도 물심량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6진으로 출전하는 종사관 김수를 찾아가 변방수비에 대한 의견을 토론하였으며 봉건정부의 명령에 따라 군량미를 지정된 지점까지 솔선 수송하여 군량을 보장하는 등 국방에 대하여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우리 나라 중세력사에서 당파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16세기중엽이후 동인계렬에 속하였던 권문해는 1583년 3~4월사이에만도 정철 등 서인계렬에 속한 봉건사대부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의 직무에서 4차례나 밀려났으며 다음해에 다시 장령자리에 임명받았으나 역시 한달만에 또다시 그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였다. (《초간선생문집》년보. 참고) 이때로부터 그는 7년간 대구 부사로 내려가 있었다.

권문해는 일찌기 《우제》*1(偶題)라는 시를 지어 자기의 정당한 처사가 일마다 어그러진다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일이 있고 대구 부사로 있을 때에는 《난망주시》*2(難忘酒詩)라는 시를 지어 당쟁이 나라의 멸망을 초래하고야 말것이라고 개탄한 일도 있다.

*1 (《초간선생문집》권2. 참고)

*2 (《초간선생문집》권1. 참고)

그는 특히 《난망주시》에서 무능한 군사지휘관들이 니탕개의 략탈을 막지 못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못살게 굴며 군사들에게 패전의 죄과를 들씌워 학살한 만행에 대하여 극도의 증오를 표시하였다.

그후 대구부사로부터 소환된 권문해는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까지 승급되였으나 거듭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환멸을 느끼고 정계에서 물러나 학문연구로 말년을 마칠 결심을 품게 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채 그는 자기가 가지고있던 책들과 평생에 저술한 글들을 잘 보관해달라는 유서를 남겨놓고 1591년(선조 24년) 11월 20일 58살의 일기로 한성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권문해의 저서로는 《대동운부군옥》밖에 문집으로 《초간집》(초간선생문집)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초간선생문집》은 4권 3책짜리 목판본인데 제1ㅡ2권에는 260여수의 시, 제3ㅡ4권에는 50여편의 소, 계, 명, 제문, 발문, 잡기 등과 부록이 수록되여있다.

그는 성균관의 여러 벼슬자리(최고로 사성(司成)까지 승급되였음)에 있으면서 경서와 력사에 밝은 유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아감에 따라 1568년(선조 1년)에 전라도사 겸 춘추관기주관(全羅都事兼春秋館記注官)에 임명된 후부터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을 여러번 력임하였다.

권문해는 37살때에는 봉건국가의 과거시험의 한 형태인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제1위로 합격하였으며 말년에는 경연참찬관 (經筵參贊官)을 력임하면서 두차례나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의 후보로 추천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권문해는 당시 학문분야에서도 폭넓고 깊이있는 다방면적인 지식을 소유한 우수한 학자로 인정받고있었다.

특히 그는 력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한 사실은 1589년(선조 22년)에 정구(鄭逑: 호는 한강(寒岡), 1543ㅡ1620)가 권문해를 만났을때 《나의 둘째형 서천상공은 매번 그대가 사학에 박식하다고 칭찬하군하였다.(吾仲氏西川相公每稱公博於史學)》*라고 말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 (《초간선생문집》 년보 56세조)

우의 기록에서 《서천상공》(西川相公)은 정곤수(鄭崑壽, 1538ㅡ1602)를 말한다.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의하면 정곤수는 조선력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잡기》(雜記), 《랭화》(冷話), 《쇄록》(瑣錄) 등 열람하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성씨와 족보에도 정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정곤수가 당시 권문해를 높이 평가한것을 미루어보면 권문해는 그와 어깨를 견줄만 한 박식한 력사학자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권문해가 력사학에 남달리 깊은 지식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은 《〈명신록〉에 수록된 서천 정곤수의 사적에 의하면 날마다 공은 유학자 권아무개에게 우리 나라 지나간 시대의 력사를 해설해주었는데 권문해는 사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였다고 한다.(按名臣錄鄭西川崑壽事蹟日公與權斯文某 講論東方前代事 權以史學名於世云)》*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엿볼수 있다.

* (《초간선생문집》년보 56세조)

후세의 학자들도 그의 저서인 《대동운부군옥》을 《운서로 된 력사서》(韻書之魯史), 《운사》(韻史), 《우리 나라 수천년간의 야사》(吾東方數千年一部野史)라고 평가하였을뿐아니라 실학파계렬의 봉건사가 리긍익(1736-1806)은 자기의 저서《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별집》에서 이 책을 《야사서목》(野史書目)에 올리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권문해가 당시 우수한 력사학자였다는것을 명백히 말해주는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저서 《대동운부군옥》에 우리 나라 력사와 관련한 내용이 비교적 많은 비률로 수록되여있다는 사실에서도 알수 있다.

그러나 《대동운부군옥》은 앞에서 류서이지 결코 력사서적은 아니다.

권문해는 력사학자였지만 오히려 일반적인 력사저서를 남기기보다는 백과사전적인 류서인 《대동운부군옥》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문화사적역할이 더 컸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선생의 불후의 업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것처럼 《대동운부군옥》은 우리 나라 사전편찬력사에서 선구자적역할을 한 우수한 백과사전유산으로 되기때문이다.

* (《초간선생문집》 서문)

이와 같이 권문해는 빈말공부와 헛된 리론에 매달리고있던 당시 봉건유학자들의 학문연구태도와는 달리 자기의 공명출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완성에 아낌없는 노력을 다 바치였으며 운자로 검색하는 백과사전적인 도서를 처음으로 편찬하는데서 선구자적역할을 놀았다.


(2) 《대동운부군옥》의 편찬경위

《대동운부군옥》은 우리 나라의 력사, 지리, 언어, 문화, 풍습 등에 관한 다방면적이고 폭넓은 지식을 주기 위하여 편찬되였다.

《초간선생문집》에는 권문해의 경력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여있을뿐아니라 《대동운부군옥》의 편찬경위를 말해주는 자료들도 수록되여있다.

《대동운부군옥》이 우리 나라의 력사, 지리, 언어, 문화, 풍습 등에 관한 다방면적이고 폭넓은 지식을 주기 위하여 편찬되였다고 하는것은 우선 편찬자 권문해가 청년시기에 룡문사에서 학문을 탐구할 때 자기 동생에게 한 말을 통하여 알수 있다.

권문해의 년보에 의하면 그는 1559년(명종 14년) 아직 과거를 보기 전인 25살경에 자기 아우에게 《우리 나라 량반들이 풍속이 비루하고 문헌이 부족하여 중국일을 이야기하는데는 그 흥망성쇠의 력사를 마치 어제일처럼 휑하게 꿰들고있으나 정말 우리 나라 일에 대하여서는 상하 수천년간의 의젓한 력사를 아주 력사이전과 같이 모르고있으니 이것은 곧 자기 코앞의것은 보지 못하고 먼 천리밖의것을 내다보려고 하는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면서 조선력사연구에 깊은 주목을 돌리였으며 기존 조선력사서적들에 결점이 많은것을 느끼고 자체로 한편의 력사서를 쓸것을 생각하게 되였다고 한다. (《초간선생문집》 《년보》 26살조 참조)

*《嘗謂監正公 (권문해의 동생 문연 (文淵)ㅡ인용자)曰東俗朴陋 文獻不備 爲士者 口談中國事 歷代治亂興亡 有若昨日事 而至於東事 則上下數千年 茫然若書契以前 此猶不見眼底物而欲注目於千里外者也 遂以講讀之暇 博攷東國諸史及事蹟之見於他書者 又病史家荒陋 有自述一家言 以備野史之意》

이것은 권문해가 당시 《선비》들이 유교경전들과 다른 나라의 시문밖에 외울줄 모르던 그릇된 학풍을 조소비판하고 학문연구에서 우리 나라의것을 깊이 연구하며 적극 내세울데 대한 진보적인 립장을 주장한것이였다.

이러한 태도와 립장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 다른 길을 택하게 하였다. 그는 비록 퇴계 리황의 학문을 신봉하였지만 경서나 외우는것을 일거리로 삼던 일반 봉건유학자들과는 지향을 달리하게 되였다.

그는 당시 이른바 《선비》들의 보편적인 학풍을 비판하였으며 그 원인으로 《우리 나라 량반들의 풍속이 비루하고 문헌이 부족하여서》 그렇다는것을 전제로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 《력사가들의 황당무계한 기록들을 병집》으로 생각하였다.

여기로부터 권문해는 장차 우리 《조선의 여러 력사문헌과 다른 문헌들에 나타나는 사적들을 널리 고찰하여…일가견을 가지고 스스로 야사를 정비하여 완비할》 커다란 포부를 피력하였던것이다.

권문해의 우리 나라 력사에 대한 연구는 20대 후반기부터 시작되여 그후 오랜 관료생활기간에도 꾸준히 계속되였으며 《대동운부군옥》은 1589년(선조 22년) 그가 대구 부사로 있을 때에 완성한것이다.

이 저서는 결국 저자의 30여년간에 걸친 고심어린 탐구와 노력의 결실로 이루어진것이다.

권문해는 조선의 《야사》를 편찬하여 우리 나라 《문헌의 불비》를 보충하겠다고 하던 큰 포부와 학문에 대한 진보적인 견해로부터 출발하여 20대 후반기부터 조선력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정력을 기울이였다.

《대동운부군옥》이 우리 나라의 력사, 지리, 언어, 문화, 풍습 등에 관한 다방면적이고 폭넓은 지식을 주기 위하여 편찬되였다고 하는것은 또한 이 책의 《범례》의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ㅇ 국호는 그 왕조가 존속한 해수의 유구함을 보여주고 지리는 고금의 연혁을 고찰하여 나라의 치란흥망의 교훈으로 되므로 사실 그대로 여기에 수록하였다.(國號則觀其歷年之久近地理則考其古今之沿革理亂興亡之戒實寓於其中)

ㅇ 세나라이전에는 문헌과 서적이 매우 드물고 탈락된것도 많으므로 사기와 전한서, 후한서 이후의 여러 책들에서 동이전을 분석하여 토지, 풍속 등에 관한 사실들이 우리 나라 력사에 수록되지 않은것들까지 다 뽑아서 기록하였다. 간혹 우리 나라 력사서적들과 서로 차이나는것이 있어도 감히 경솔하게 고치지 않고 본래의 책에 씌여진 그대로 기록하였다.(三國以上文籍鮮少多有脫略故考史記及前後漢以下諸書東夷傳凡干土地風俗等事未載於東史者悉拈出書之或有與東史相左者不敢輕改依本書書之)

ㅇ 신라때에는 고유한 우리 말을 많이 썼는데 설사 오래전의 말이여서 지금은 알수 없는것이라고 하더라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하였으므로 당시 세상의 도덕기풍과 인물들의 순후함과 소박함도 이 책에서 찾아볼수 있을것이다. 마을과 항간에서 쓰이는 속담이나 야비한 말들에서도 조금이라도 세상의 교화에 이바지하고 교훈을 주는 말들이라면 그러한 말들도 남김없이 수록하였다.(新羅時多有方言雖涉無稽亦錄而不刪者當時世道洪荒人物之淳朴亦可以此而考見矣里巷間鄙諺俚語少有關於勸戒者則亦收錄不遺)

ㅇ 읍루와 말갈족은 다 우리 나라의 지방과 련계된 종족인데 한서와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도 동이전에 수록하였으므로 여기서도 그것을 아울러 기록하였다.(挹婁勿吉皆係我國地方漢書及三國志諸書亦收入於東夷傳故並記之)

ㅇ 우리 나라의 날짐승, 길짐승, 꽃나무들은 그 이름이 중국의것과 많은 경우 다르므로 고유한 우리 말 이름은 모두 그대로 기록하여 알기 쉽게 하였다.(我東方禽獸花木其名號與中國多有不同故有俗名者皆因而記之使人易曉也)

ㅇ 세나라시기부터 전해오는 서적들이나 고려사 세계에는 괴이한 일들이 많아 비록 전적으로 믿을수 없다고 할지라로 《삼국사》나 《고려사》에도 그것을 수집하여 넣었으므로 이제 그것을 함께 기록한다.(三國遺書高麗世係事多怪誕雖不可盡信三國史及高麗本史亦收而入之故今並錄之)

《대동운부군옥》에는 권문해가 직접 쓴 《자서》(自序)가 없다. 때문에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편찬에서 추구한 목적과 의도를 직접 찾아볼수는 없으나 범례가 비교적 상세하므로 이를 서문으로 대신할수 있다.

이상의 범례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권문해는 우리 나라의 《문헌의 불비함》을 보충완비하며 계승발전시킬 목적으로 당시 우리 나라에서 이룩한 한자음운학의 성과에 토대하여《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였다.

권문해는 당시 우리 나라가 달성한 한자음운학의 여러 성과들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실지로 《세상에 필요한 학문을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에서 이전부터 준비하여오던 야사편찬을 위해 축적한 자료들을 가지고 마침내 《대동운부군옥》을 편찬완성하였던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한자음운학의 연구는 15세기 전반기에 전례없이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사정으로 일시적인 부진상태에 빠지게 되였으나 16세기초에 《사성통해》의 편찬을 계기로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고 다시 활기를 띠게 되였다.

16세기에 들어와 최세진에 의하여 《사성통해》와 《운회옥편》 등이 편찬됨으로써 15세기에 편찬간행된 《동국정운》, 《사성통고》 등과 함께 우리 나라의 한자운서와 옥편은 점차 완비되여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운서와 옥편은 한자의 음을 훈민정음으로 표시하는 등 체제상 한걸음 더 발전하게 되였으며 결국 중국의 운서와 옥편들을 직접 리용하는데서 겪게 되던 적지 않은 불편을 덜수 있게 됨으로써 조선의 한자자전으로서의 리용상편리와 실용성을 갖추게 되였다.

그러나 고사, 성어를 비롯한 한자어휘들을 서로 비교하여 분석하거나 고증하는데서는 당시까지 중국의 류서인 《운부군옥》*등이 리용되고있었다.

《운부군옥》은 당시 봉건문인들의 문필활동에 널리 리용되였는데 특히 중국관계의 고사, 성어를 해결하는데서 사전과 같은 책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있었다.

* 음시부의 《운부군옥》은 우리 나라에서 일찍부터 중시되여오던것으로서 세종은 1435년 강원도감사 류계문에게 그 복각을 명령한바 있다.

《운부군옥》의 발문에서 남수문(南秀文)은 《이 책은 비록 내용이 간략하나 만권의 책에 담을 내용을 포괄망라하고있으므로 독자들로 하여금 곤륜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옥돌들을 마음대로 골라잡는바와 같게 하고있으니 참으로 군옥의 부(群玉之府ㅡ여러가지의 고사, 성어와 시구 등 주옥을 담은 책이란 뜻-인용자)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책을 얻어서 열람한다면 그 유익함을 어찌 다 말할수 있겠는가? … 운부군옥이란 책은 문필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바가 실로 많다.》*라고 썼다.

* (《동문선》고서간행회본 5책 286페지)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1436년(세종18)에 출판되였다.

이것이 권문해 이전까지 우리 나라에서 자체의 한문사전을 준비한 경로라고 말할수 있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 고유문자인 《훈민정음》을 리용하여 조선한자음을 정확히 그리고 통일적으로 표시하는 한자운서, 자전의 준비기로 특징지어진다면 그후 한세기는 명실공히 조선관계한자어휘를 수록한 사전을 준비하는 시기로 특징지어진다.

조선특유의 한문사전의 준비는 이 시기 우리 나라 학자들속에서 자기 조국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우리 나라 고전문헌들을 직접 리용하는데서 부닥친 곤난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데로부터 시작되였다.

즉 운서나 옥편은 그 어느것을 가지고서도 우리 나라 고전문헌들에 씌여진 한자의 음과 뜻을 큰 지장이 없이 해석할수 있었으나 당시에 리용되던 중국의 고사, 성어, 시구만을 수록한 사전으로서의 《운부군옥》을 가지고서는 우리 나라의 고사, 성어 등 한자어휘들을 서로 비교하여 분석하거나 고증할수 없었으며 그 출처를 밝힐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고사, 성어들을 분석하거나 고증하려면 직접 해당한 고전문헌들을 힘들여 읽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고전문헌의 연구와 리용에 막대한 장애로 되였다.

권문해는 바로 이러한 사정을 포착하고 우리 나라의 고전문헌들에 반영된 고사, 성어, 시구, 사건, 사실, 인물, 제도, 풍속 등을 올림말로 선정하여 운서체계로 배렬하고 해설해놓는다면 《사람들이(조선의) 고실[故實–고사(故事)와 사실(事實)이라는 말로서 따라 지켜야 할 철칙의 근거로 되는 옛일ㅡ인용자]을 상고해보는데 편리》를 주어 우리 나라 고전문헌의 정수를 정확히 인식하고 널리 리용하는데 실지로 이바지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의 《운부군옥》을 만들게 되였던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정범조는 《대동운부군옥》의 서문에서 중국의 《운부군옥》에는 《조선사실에 해당하는 사항이 없다.》고 하면서 권문해가 이 책을 편찬하게 된 동기를 지적하였던것이다.

권문해는 이 방대한 사업을 위하여 벌써 30대 전후부터 《조선사실에 해당하는 사항》들을 국내외의 수많은 문헌들에서 널리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 나라 고전문헌들에서 빠지고 흩어진 부분까지 망라하여 56살때에 최종적으로 《대동운부군옥》을 완성하였던것이다.

권문해에 의하여 《대동운부군옥》이 편찬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자체의 조선사전을 처음으로 마련하게 되였던것이다.

한편 《대동운부군옥》이 완성되던 무렵에 중국의 《운부군옥》을 다시 증보하는 사업이 일부 학자들속에서 시도되였다. 그 과정에 허균에 의하여 《증보운부군옥》이 편찬되게 되였다. 말하자면 음시부의 《운부군옥》이 가지고있던 부족점이 《증보》됨으로써 《운부군옥》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 학자들의 요구수준에 더욱 적응하도록 발전시켰던것이다.

우리 나라는 16세기말~17세기초까지 자체의 한문자전 및 사전(운서, 옥편과 《대동운부군옥》및 《증보운부군옥》)의 3부작을 완비하게 되였으며 이로써 학자들이 중국사전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나라 학문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였다.

이처럼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을 통하여 우리 나라 사전편찬의 토대를 마련하고 개척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대동운부군옥》은 편찬된 후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한것으로 하여 오래도록 출판되지 못하고 그저 사본으로 전승되여왔으며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목판 및 활판으로 인쇄, 류포되였다.

지금까지의 글들을 보면 이 책이 1798년에 정범조의 서문을 붙여 출판되였다고 서술한것도 있지만 1812년(순조 12년)에 출판된 《초간집》의 서문과 발문에 의하면 《대동운부군옥》은 《초간집》의 출판이전에는 출판간행된 일이 없다는것이 명백히 기록되여있다*.

* 일제 어용학자 마에마 교사꾸(前間恭作)는 《고선책보》(古鮮冊譜) 제3분책에서 《대동운부군옥》은 《가경 3년》(嘉慶三年) 즉 1798년(정조 22년)에 출판되였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정범조의 서문의 《성상(聖上ㅡ정조) 22년》이라는 문구를 들었다. 정범조는 1723년부터 1801년까지 생존하였는데 그가 형조판서를 지낸 성상 22년은 정조 22년으로 된다.

《조선어학사》(朝鮮語學史. 1940년. 오꾸라 신뻬이)에서는 《대동운부군옥》의 간행년도를 영조 22년(1746)으로 보았는데 그렇게 되면 정범조가 23살에 형조판서를 지낸것으로 된다.

그러나 《초간집》서문에 의하면 《대동운옥은…그 책의 편수와 량이 매우 방대하므로 오늘날 아울러 간행할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大東韻玉…其編浩穰未能幷刊於今日是可恨也)라고 하였고 발문에는 《그리고 또 이 〈초간집〉에 앞서서 〈운옥〉이 있는데…아직까지는 간행되지 못하였고 후날 간행되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여기에 그 범례와 목록 그리고 후세사람들이 찬탄한 말들을 첨부하여 적는다.》(又先此集而遺韻玉…尙有待於來世也姑編其凡例錄目幷附後賢表章之言)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대동운부군옥》이 《초간집》(1812년ㅡ순조 12년)과 동시에 출판되지 못하였다는것을 명백히 말해주고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서문을 쓴 정범조가 죽은 다음에도 20여년이 지나서야 출판되였다.

이처럼 《대동운부군옥》은 1589년에 편찬된 후 무려 230년의 세월이 지난 1822년에야 비로소 례천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되게 되였으며 그후 1913~1914년에는 원저서의 9권 9책까지를 수록한 활자본이 출판되였다.

우리 나라 민족고전문헌들가운데는 《대동운부군옥》과 같이 편찬된 다음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출판된 문헌은 그 류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동운부군옥》의 출판이 미루어지게 된 근본원인은 우선 편찬직후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여기에 관심을 돌릴수 없게 된것과 관련되여있다.

이 책의 전사, 류포경위에 대하여서는 현행 판본에 수록되여있는 정범조의 서문 및 김응조의 발문 등에 자세히 서술되여있다. 그에 의하면 책의 완성직후 저자의 친우이며 당시 부제학이였던 학봉 김성일이 청서본 한벌을 한성으로 가져가서 성균관에서 출판하려다가 임진왜란으로 하여 파탄되였고 청서본 한벌은 역시 저자의 친우인 한강 정구가 빌려갔다가 불에 타버리고말았다. 전후에 청서본 한벌이 저자의 집에 겨우 남아서 봉산서원에 소장되게 되였는데 그것이 저본으로 되여 차차 많은 전사본들이 생기면서 널리 류포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통해서도 알수 있는것처럼 임진조국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민족고전문헌의 편찬간행을 비롯한 과학문화의 발전에서도 커다란 피해를 받게 되였으며 예로부터 전해져오던 수많은 문헌들이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소각략탈되였거나 류실되게 되였다.

《대동운부군옥》의 출판이 미루어지게 된 원인은 또한 16세기 중엽이후 조선봉건왕조통치배들속에서 벌어진 당파싸움과도 중요하게 관련되여있다.

당파싸움은 조선봉건왕조사회에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발전을 크게 가로막았으며 당시 인민들의 생활에 헤아릴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당파싸움이 계속되는 과정에 봉건통치배들은 더욱더 부패타락하고 사대주의를 일삼으면서 개인의 권력과 향락을 추구하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16세기이후 더욱더 격화된 류혈적인 사화 및 당쟁과 같은 봉건지배계급내부의 혼란과 그들의 정치도덕적부패는 15세기에 개화발전하였던 봉건문화에서 볼수 있었던 국가적규모의 편찬사업마저 더 계속해나갈수 없게 하였다.

조선봉건왕조통치배들은 개인편찬의 《대동운부군옥》과 같은 도서의 출판 등 나라의 학문, 문화적유산들을 보존하고 계승발전시키는 사업에는 관심조차 돌릴수 없었다.

《대동운부군옥》의 출판이 미루어지게 된 원인은 또한 이 책이 개인편찬의 책으로서 그 분량이 매우 방대한것과도 일정하게 관련되여있었다.

이 책은 개인편찬의 책으로서는 보기드문 20권 20책으로서 오늘날 국판 사전판형으로 인쇄한다면 대략 1 200페지이상 되는 방대한 분량을 이루고있다. 그리고 사전형식의 책이므로 출판공정도 다른 책들에 비하여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든다고 말할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초에 조선광문회에서《대동운부군옥》을 연활자본으로 출판하면서 그 전체분량의 절반도 채 안되는 9권 9책까지의 내용밖에 수록하지 못한 미완성본을 내놓은 사실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하여 《대동운부군옥》은 오래동안 출판되지 못하고 사본으로 전승되여왔으며 근대에 와서야 출판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