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바구니, 꽃다발, 꽃송이….
꽃바다가 흐른다.
저녁무렵, 끝없는 꽃물결속에 류달리 이채로운 꽃다발을 들고오는 젊은 녀성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서른을 갓 넘겼을가. 그 녀성의 저고리차림도 우아했지만 생신한 활력과 함께 숫저운 표정이 어린 아릿다운 용모는 그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순후하게 정화시켜주는듯 했다.
활달한 걸음걸이로 도로옆 꽃매대에 다가간 그는 매대안의 시렁우에 놓인 화분들과 바구니들에 가득가득 피여난 아름다운 꽃들을 눈여겨 둘러보았다.천수국, 흰색다리아, 붉은 장미, 분홍빛장미… 매대안에 활짝 피여난 서로 다른 꽃들이 저마끔 손저으며 향기를 뿌리는듯 싶다.
꽃매대 봉사원들이 그를 알아보더니 몸가짐을 바로하며 서로마끔 인사를 했다.
《꽃이 잘 피였군요. 사람들이 좋아해요?》
《예, 우리 식물원매대의 꽃이 류달리 싱싱하다고 모두가 칭찬입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꽃바구니에 비스듬히 꽂혀있는 다리아송이를 바로 잡아주고나서 판매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내며 돌아섰다.
몸가짐과 외모가 준수한 이 녀성은 중앙식물원 실장인 림선경이다. 무심히 눈길을 들어 길건너편 인도로를 따라 걸어오는 사람들쪽을 보던 그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낯익은 모습을 발견한것이다. 고집스럽도록 꼭 다물려있던 그의 붉은 입술이 방싯 열리더니 나직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진석동무, 동무도 왔구만요.)
선경의 얼굴에 한줄기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나 그것은 순간이였고 다시 서느러운 기운이 돌았다. 선경의 눈길이 가닿은곳에서 키가 훤칠한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만수대언덕을 바라보고있었다.
동상을 우러르는 청년의 번쩍이는 시선이 더욱 강렬하게 빛난다. 땀에 푹 젖어든 샤쯔, 어깨를 파고드는 묵직한 보위색배낭, 노끈으로 꼭 묶어 두손에 갈라든 서류꾸레미… 지하건늠길을 건너 이편으로 넘어온 청년은 고개를 수그린채 묵묵히 걸어왔다.
《진석동무, 안녕하십니까?》
그제야 선경을 알아본 진석의 두눈이 확 밝아졌다.
《아, 선경이!》
흥분한 그는 너무 반가와 어쩔줄 몰라했다.
오른손에 쥔 서류꾸레미를 왼손으로 몰아잡으며 성급히 손을 내밀었다.
볕에 그을린 손은 크고 마디가 굵었다. 그러나 선경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채 고집스레 서있기만 하였다.
그제야 진석은 쳐들었던 손을 슬며시 내리우며 점직한 낯빛을 지었다.
(이렇게 이 동무와 만나다니…)
선경은 진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가 겉늙어보였다. 차림새도 어딘가 촌티가 났다.
머리모양만은 대학시절부터 한번도 변하지 않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상고머리였다. 그 머리형태만이 대학시절의 그를 상기시켜주었다.
두사람은 다 벙어리가 된듯 한동안 말문이 막혀버렸다. 삽시에 서먹서먹해진 그들은 어색한 표정을 감추느라 잠시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오가던 행인들이 한쪽으로 비켜선 그들을 스쳐보고 지나간다.
《만수대동상에 가는 길이요?》
진석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
《…》
《함께 가시자요.》
약간 누그러진듯 한 어조였다.
그러나 진석은 그의 요구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좀 난처한 기색을 짓더니 떠듬떠듬 말하였다.
《저, 내 옷차림이 어지러워서…후에 다시 만납시다.》
《또, … 후에요? 지금 어델 가십니까?》
《콤퓨터쎈터에 의뢰했던 모의시험결과를…》
《그렇습니까? 동문 여전하군요.》
자존심이 가득찬 선경의 어조에서 어쩐지 상대에 대한 모욕감이 느껴졌다.
《뭐가 말이요?》
진석의 목소리를 어지간히 주눅이 들어있다.
선경은 대답대신 조용히 손을 쳐들어 멋지게 파도쳐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이때 저쪽에서 선경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선경언니-》
그래도 대답이 없자 더 큰소리로 《실장언니, 빨리요-》하고 소리친다. 앞서가던 같은 부서의 어린 처녀가 같이 가자고 찾는것이다. 지방에서 출장올라온듯 한 청년과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서있는 선경을 보며 의아한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어린 처녀의 볼우물진 두뺨에 묘한 웃음이 남실거린다.
진석은 그 처녀를 무심한 표정으로 일별하고나서 선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실장사업을 하오?》
선경은 대답대신 두눈을 내리깔았다.
《축하하오.》
그 목소리에 진정이 울렸다. 허나 선경은 응대를 않고 자르듯 말했다.
《저, 부서동무들이 기다려요.》
선경의 얼굴에 얼핏 떠올랐던 옅은 화색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실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돌아서더니 총총 걸음을 옮겼다.
진석은 이윽토록 그 자리에 서있었다.
선경의 모습은 꽃물결을 이루며 걸어가는 사람들속에 섞여들었다. 마치 한개의 꽃송이와도 같이…
××
이 이야기는 10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대학동창이였던 그들은 그때 서로 류다는 친근감을 느끼고있었다. 잊을수 없는 그들의 인연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였던지.
진석이가 책임자로 있으면서 언제나 친오빠처럼 배워주던 중학교생물소조의 실험실에서부터였는지. 아니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선참으로 농촌지원대로 탄원해갈 때 뒤늦게 알고 달려온 선경이 목에 매였던 붉은넥타이를 풀어 흔들던 그날의 역두에서인지. 아니면 전국대학생최우등생대회에 대표로 선출되여 영예로운 자리를 같이했던 열정의 그 나날들에서였던지…
그들은 중학시절부터 친숙해졌고 서로 위해주었으며 같이 대학에 와서는 또 경쟁을 했다.
한쪽은 친근한 오빠였고 다른쪽은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일뿐이였다.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들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인식하였다. 대학졸업론문을 준비하느라 도서관에 붙박혀 기술문헌을 조사하며 며칠밤을 새우던 진석은 코피까지 쏟으며 졸도해 넘어진적이 있었다.
깊은 밤, 진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안겨온것은 아름다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내려다보는 선경의 얼굴이였다. 그는 순식간에 모든것을 알아차렸다. 백설같이 깨끗한 바탕에 참대곰이 엎드려있는 선경의 손수건에 피자욱이 얼룩진것을 보았다. 쑥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그러나 역시 행복한 밤이였다.
그때 근심에 싸여 무리하지 말라고 재삼 당부하는 선경에게 그가 기껏 한 소리라는게 《…그래야 먼 후날에도 젊었을 땐 피쏟으며 공부해보았다고 말할 근거가 있지 않소.》가 전부였다.
그리고는 또 책을 펼쳐들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무수한 이야기들속에 유독 사랑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선경의 가슴에는 이 불같은 열정과 비상한 두뇌를 가진 청년의 모습이 새롭게 간직되면서 이름 못할 환희와 기대 그리고 불안으로 설레이군 하였다.
선경은 차츰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기군 하는 때가 많아졌다. 책을 보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그는 공상에 잠기군 하였다.
무지개빛으로 채색된 행복의 무아경, 그 아름다운 공상의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와 진석이였다.
그는 혹시 아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것 같아 공연히 낯을 붉히고 별치 않은 일에도 와뜰 놀라군 하였다.
그때 선경의 눈에 비낀 진석은 가장 믿음직한 동지, 청춘과 리상을 맡기고 일생의 행복을 공동설계할수 있다고 믿어지는 《단 한명》의 재사였다. 이미 대학 2학년때 후보학사론문을 발표하여 소문을 냈던적이 있는 그는 이때에 와서 최신기술로 인정되고있던 새로운 육종분야에 대한 연구사업에 착수했었다.
선경은 때없이 모든 신경이 진석에게 가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심각하게 자책하며 마음을 도사려먹고 책을 펼치군 하였다.
(진석동무의 연구성과에 못지 않는 나의 창조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해. 그때면…)
처녀의 가슴속에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던 사랑이 열정의 불길로 치솟으려는 무렵 청천벽력같은 비보가 전해졌다.
하늘땅이 꺼질듯 번개치고 우뢰울고, 산천초목도 비분에 몸부림치며 호곡하던 7월의 그날.
그들은 밤마다 만수대동상을 찾아 호상을 섰다. 넘쳐나는 눈물을 묵새기기엔 그들의 가슴이 지내 작았고 터져오르는 오열을 씹어삼키기엔 너무도 비통한 불행이였다.
만주광야의 설한풍을 헤치고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시면서 사회주의제도를 마련해주신
짓밟힌 인민을 구원하시려 밀림의 긴긴밤을 지새워 광복의 아침을 마련하시고 한평생을 바치시여 우리 인민들이 골고루 잘살도록 행복의 락원을 마련해주신 민족의 위대한
이틀, 사흘, 나흘…
그만에야 그들은 쓰러졌다. 그랬다가는 눈물을 씻으며 다시 일어나고…
가슴저미는 그 나날들에
그러나 이 기간에 선경이가 진석에게 커다란 실망을 느끼게 될줄이야!
그것은 무서운 사실이였다.
그밤에도 선경은 진석과 함께 만수대언덕우에 높이 모신
《오랜 세월 많은 고생을 겪어오신 우리
이 시기에 와서 더욱더 과묵해지고 침중해진 진석이였다.
그날 만수대언덕을 내리며 선경은 어깨가 처져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진석에게 조심히 말을 떼였다.
《저, 진석동무.》
진석은 발끝만 내려다보며 대답이 없었다.
《저에게 이런 생각이 있어요. 이 만수대언덕에 사철 지지 않고 피여있는 훌륭한 꽃들을 심는것이 어때요.》
진석은 깊은 생각에 잠긴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였다.
며칠후 선경은 방학을 리용하여 꽃나무 뜨러가는 차편이 있는데 함께 가서 좋은 꽃나무들을 떠오는것이 어떤가고 진석에게 물었다.
진석은 대뜸 찬성했다. 선경은 자기들이 함께 떠나게 될 이 길이 자기들의 우정은 물론 대학졸업이후 인생의 구체적좌표를 설정하는 중요한 계기로도 될것이라고 확신했다.
《차가 래일 새벽 일찌기 떠나요. 늦지 말고 나오세요.》
이튿날 아침.
진석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였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도록 무소식이였다.
삽 두자루를 들고 길 한복판에 나서서 진석이가 달려올 건너편 큰길만 목빠지게 바라보던 선경은 사람들의 독촉을 받고서야 맥없이 차에 올랐다.
들추는 자동차의 뒤구석에 않아 이제나저제나 진석이가 나타나지 않을가 하여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경이 진석을 알게 된 때로부터 오늘까지 진석이가 약속을 어긴적은 한번도 없었다. 언젠가 선경은 선망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은적이 있었다.
《약속은 인격이라지요? 그렇지요?》
그때 진석은 《아니, 약속은 곧 인간이요.》하고 대답했다. 매사에 시계와 같이 정확하고 약속을 법처럼 여기던 진석이가 사사로운 일도 아니고 이런 《중대사》에 약속을 어기다니…
후에 조용히 물어보니 로상에서 우연히 만난 육종학분야의 저명한 박사선생님에게서 자기의 연구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조언을 받느라고 시간을 놓쳤다는것이였다.
선경은 미간을 찌프렸다. 처음으로 그에게서 느끼는 실망이였다. 그러나 그의 이 《실망》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듯이 그 다음부터 진석은 더 분주히 《돌아쳤》다.
좀 붙잡으려면 짜장 미안쩍은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정 바쁜데…》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그의 학위론문이 학계에서 큰 론의거리로 되고있는데 이 론문만 통과되면 그는 당당히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것이라는것이였다. 언제인가 한번은 미안해서인지 진석이가 자기쪽에서 좀 만나자고 하고서는 그 시간에 나타나지도 않고 실험실에서 헤매고있었다. 꼬박 두시간이나 기다리다가 겨우 그의 행처를 찾아 실험실에까지 찾아갔던 선경은 거기에서 유명한 학자인 학위학직심의위원과 론쟁을 하고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러니… 자기 학위때문에?)
의혹은 곧 불신에로 이어졌다. 아닐세라 졸업식을 하는 날 과연 그에게 학사학위와 함께 최우등상이 수여되였다.
(공명주의자. 자기 명예를 위해서는 약속도 우정도 필요치 않은 사람!)
길이 험하면 말을 알아보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안락하고 평온하던 시기의 한달이나 일년보다 이 고통스러운 시기의 하루, 한시간이 인간의 본심을 더 잘 알수 있게 하는듯 싶었다.
이제는 모든것이 리해되였다. 가식의 면사포는 벗겨졌다. 남모르는 밤길을 함께 거닐며 곧잘 외우던 그 모든 애국과 충정도. 심장이 터질듯한 그 부고를 들은 그날 밤 모란봉의 어느 나무밑에서 주먹이 으깨여지도록 바위를 내리치며 꺽꺽 목메여 울던것도 다 가짜이다.
참대가 굽으랴, 소금이 쉬쓸랴 했더니…
졸업식이 끝난 날 밤.
진석이가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며 뻐스정류소에까지 따라오자 선경은 픽 돌아서더니 날아가는 새도 쏴떨굴듯한 서리찬 시선으로 가로세로 흝어보다가 홱 돌따서 그냥 가버리고말았다.
입을 꼭 다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의 혀끝에서는 당장 터져나올듯한 저주가 뭉켜돌아가고있었다.
(
진석은 더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얼마후 진석은 지방의 어느 협동농장에 현실연구생으로 내려갔다. 선경은 식물원으로 배치받아갔다.
대학졸업후 오늘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같이 동상을 찾아 꽃을 올리는것을 중단한적이 없는 그였다. 생물학전문가인 그의 노력으로 철을 앞당겨 여러종의 꽃들이 피여났고 사계절 가림없이 그가 피운 꽃들이 만수대언덕의 꽃바다에 합쳐지군 했다. 그가 밤잠을 못이루며 정성다해 키워낸 꽃들이 위대한
참으로 그의 이악성은 놀랄만한것이였다. 그의 손만 가닿으면 꽃들이 싱싱하게 피여났고 그의 끊임없는 연구에 의하여 잔국화가 우리 나라 기후풍토에 맞게 적용되여 금수산기념궁전과 만수대언덕을 비롯하여 전국각지의 혁명사적지들에 만발하게 되였다. 또한 해마다 진행되는 《
그는 진지하고 성실한 연구사였고 훌륭한 원예사였다.
선배들과 동료들의 찬사의 목소리가 그칠줄 몰랐고 꽃을 위해 바쳐진 그의 노력이 신문에도 널리 소개되였다. 선경은 가끔 진석을 생각했다.
식물원 잣나무숲 돌의자(그곳에서 그들이 시험공부를 함께 하군 하였다.)를 지날 때면 짜릿한 회억의 물결이 가슴속에 갈마들어 한동안 그 자리에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그럴 때면 무엇을 잃은 사람처럼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서글퍼지는것이였다. 기억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진석에 대한 추억이 다른 총각들의 사진앞에 서면 그를 괴롭히군 하였다. 들려오는 소리에 의하면 어느 산간농장에 시험포전을 꾸리고 새 품종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큰물에 사태가 나서 연구사처녀를 부상입혔다는 말도 있었고 의사였던 어머니에게까지 자기 연구의 한부분을 맡겨 늙은이가 일년내내 시험포전을 가꾼다고도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중한 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선경은 즉시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같은 학급동무이기때문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면서…혹시 그를 만날수도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진석은 침대에 누운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몇분간 지켜보다가 그냥 돌아섰다는것이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리라 생각했던 진석은 굳이 잊으려 해도 잘 잊혀지지 않았다. 또 여러해동안 집을 떠나 고생하고있는 그에 대한 야릇한 동정과 가느다란 기대가 엇갈려 안개와도 같이 가물거리는 때가 있었다.
× ×
이제는 중앙기관에서 사업하는 실장이 되고 축전때마다 7차례나 특등을 하여 온 식물원사람들의 존경을 독차지하고있건만 선경은 가끔 고독을 느끼군 하였다. 그 고독은 생활의 진정한 반려가 없는데서 오는것이였다. 부모들과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부서의 화목한 분위기도 선경의 이 개인적고독만은 가셔주지 못했다. 그는 아픈 상처를 헤집고 진석을 생각하군 하였다.그때마다 그는 그의 마지막부름에 대답하지 않은 그 시각(졸업식)을 거의 후회에 가까운 심정으로 추억하는 자신을 두고 놀라군 하였다.
(혹시 그때 내가 너무하지 않았을가?)하는 생각이 머리속에 떠오르는것이였다. 또 어떤 때는 소설책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서는 참된 사랑은 고뇌를 동반한다는데 우리가 혹시 고뇌라는 과정을 거치는것이 아닌가 하고 어이없는 생각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하긴 우리들이 사랑을 약속한것도 없지 않은가?)
선경에게는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없었다. 단지 사랑은 억지로 할수 없다, 스스로 끌려가야 하는것이다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뇌를 겪는다는 선경의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였다. 진석은 이미 7년세월이 지나도록 편지 한장 없는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랑도 우정도 아닌것이다. 처녀는 도고한 자존심으로 진석의 일에 대하여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다 동창생들의 입을 통하여 그가 아직도 농촌에 있다는것을 알았을뿐…
선경에게 이런 고독이 있으리라 예기치 못했던 잊지 못할 대학시절!
그때 진석은 얼마나 돋보였는가. 그는 정말 모르는것이 없었다. 그리고 모든것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진중한 그의 학구적인 태도속에서 새로운 발견이 무수하게 나타났고 선경은 거기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드는것이였다. 만경대고향집방문을 마치고 학급이 4.15소년백화원에 들린적이 있었다.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화원에서 선경은 연해연방 탄성을 지르며 진석에게 물었다.
《진석동무, 꽃이 왜 아름다울가요?》
활짝 핀 꽃들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말이 없다가 만경대고향집쪽을 바라보는것이였다.
《꽃이 왜 아름다운가? 글쎄 …그것은 아마 …눈물을 감추고 만사람에게 웃음만을 주기때문일거요.》
진석은 머리를 들어 먼 하늘가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난
순간 선경의 얼굴에 번져가던 미소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의 쌍가풀진 두눈이 불그레해졌다.
《아버지, 어머니들이 언제나 자식들앞에 괴로움과 눈물은 감추고 기쁨과 웃음을 안겨주려 하지. 우리
그때, 그 시절에는 얼마나 진석이가 훌륭했던가! 그의 진정에 감동을 금치 못하면서 그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벗이 그토록 훌륭하다는것으로 하여 행복했었다. 그로 하여 선경은 꽃에 대한 연구를 생각하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다름아닌 진석이가 자기 이름 석자때문에 약속을 어기다니…
× ×
밤, 고요, 무더위
도시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가로등이 밝히는 포장도로로 가끔 가다 들리는 자동차소리마저 더위를 몰아오는듯 싶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후끈한 열기에 가로수들도 지친듯 겨우 몸을 흔들뿐.
가물과 무더위로 낮동안 맥없던 나무잎들은 새벽녘이 되여서도 휘주근히 가지에 매달려있다.
새벽 2시, 잊을수 없는 바로 그 2시이다.
한점의 어둠도 없이 대낮처럼 환히 밝혀져있는 만수대언덕으로 새까만 치마저고리를 입은 한 처녀가 아름답고 싱싱한 송이마다에서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꽃다발을 정히 가슴에 안고 한걸음한걸음 계단을 밟아오른다. 선경이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땀이 흐르는 무더운 날씨여서 저고리를 입은 처녀의 다소곳이 숙인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내돋았건만 정히 들고가는 꽃다발에만은 청신한 기운이 서려돌았다. 만수대언덕에 올라 저 멀리 밝은 미래를 가리키시며 거연히 서계시는
어디선가 인기척이 났다.
저쪽에서 검은 양복차림의 젊은 남자가 낯익은 자세로 다가왔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꽃다발을 안은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걸어온다. 머리를 수그리고 걸어오는 젊은 청년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던 선경은 저으기 놀랐다. 그 사람의 륜곽에, 거동에 심장이 후두둑 뛰였던것이다. 그를 보면 심장이 아파나는것은 전에 없던 일이였다.
(아니야. 그럴수 없어. 절대로 그럴수 없어.)
그의 리성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온 륙감은 한사람의 이름만을 집요하게 웨쳐대고있었다.
그렇다! 그는 진석이였다. 선경은 드디여 그를 이 성스러운 언덕우에서 만난것이다. 선경은 그를 다시 보게 되는 이 순간 그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안개처럼 서서히 걷히는것을 느끼며 태연해지려 애썼다. 한편 다행스럽기도 했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진석을 바라보는 선경의 눈에 놀라움이 비꼈다. 동상앞에 서서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그의 두손에 눈부시게 흰 종이말이가 들려있는것이였다.
(무엇일가?)
알수 없었다. 과연 무엇일가.
지난 10년간 선경은 이곳을 찾아오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어른, 아이, 외국인, 해외동포들- 그들중에는 꽃다발을 안고 오는 로력혁신자도 있었고 풍년든 과원에서 과일바구니를 들고오는 농민도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새하얀 종이말이는 처음 본다.
(무엇일가?)
진석은 조심히 들고 온 종이말이를 소중히 품에 안고 정중히 고개숙인다. 이윽고 머리를 든 그는 그이앞에 도면을 펼쳐들고 마음속으로 흐느끼는듯 어깨를 떨며 서있었다. 한순간 오리무중속에 빠져있던 선경은 저도 몰래 진석이가 펼쳐든 그 종이말이에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걸음, 또 한걸음…
그것은 도면이였다. 《다수확품종<주-96호>의 육종 및 배비관리공정도》라는 제호옆에 국가발명승인번호가 찍혀져있다.
(?!)
선경은 놀라웠다. 국가에 수억원의 리익을 줄수 있다는 이 다수확품종에 대해 언제인가 들은적이 있었던것이다.
(진석동무가? 그럼 어느 젊은 과학자가 연구한다던 다수확품종이?)
선경의 가슴은 새로운 기대와 감동으로 세차게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 ×
걷잡을수 없는 흥분과 강한 흡인력에 끌려 선경은 정신없이 걸음을 다우쳐 진석을 따라잡았다. 온 누리를 뒤덮은 검은 비로도장막같은 어둠을 뚫고 멀리에서 비쳐오는 한가닥의 불빛이 희미하게 그늘을 던진 어느 나무밑에서 그들은 마주쳤다.
《진석동무, 동문 지금 저를 비웃겠지요?》
《할 말이 없소.》
《전 지난 8년간 터무니없이 동무를 저주해왔답니다. 그러니 오늘 저한테…》
격동된 선경의 목소리는 두서없이 다급하게 울렸으나 진석은 무겁게 한숨을 쉬고나서 뜨직뜨직 말했다.
《동무가 퍼부은 저주는 … 터무니없는것이 아니였소. 나는 응당… 저주를 받아야 할 놈이였소.》
《아니예요. 그거야 그 어떤 몰리해때문에…》
《몰리해가 아니요, 난 정말 배은망덕한 놈이였소.동무도 잘 아다싶이 나는 18년전…》
여기까지 말하고나서 진석은 말을 끊고 주머니속에서 담배곽을 꺼냈다. 담배를 피우는것도 그전에는 못보던 일이다.
그러나 첫 모금에 개켜 맹렬히 기침을 하는것을 보니 인박히기는커녕 아직도 피울줄을 모르는것 같다. 진석은 곧 담배를 집어던졌다.
선경은 목마른 사람처럼 입술을 감빨며 꾹 다문 진석의 입만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진석은 선경이쪽은 보지도 않고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제일처럼 생생하오. 그때 나는 조선소년단 전국련합단체대회에 참석하신 위대한
이 나라의 수천만 아들딸들이 그처럼 소원하면서도 쉽게는 이룰수 없었던 그 꿈이. 그런 크나큰 행운이 진석에게 차례졌던것이다.
진석은
《…그러시고나서 이 다음에 커서 무슨 사람이 되겠느냐고 물으시였는데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방망이질하는것 같았소.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씀올렸소, <아버지
<좋아. 아주 좋아. 정말이야. 나와 약속하자구>하시며 나의 작은 손을 꼭 잡아 흔들어주시는것이였소!》
《!》
그날 밤 학교의 동무들이 진석의 손을 잡아보겠다고 그의 집으로 문이 터져나가게 몰려왔었다. 그날을 눈앞에 그려보는듯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진석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나는 그날의 영광, 그날의 맹세를 잊을수가 없소. 이 약속!... 그러나 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더랬소. 내가 누구의 덕분인지도 망각하고 행복에 도취되여 교정을 오가고 사람들의 찬사와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연단에 오를 때 또 동무와 함께 고운 새 우짖는 산보길을 거닐고있을 때 우리 인민에게 보다 유족한 생활을 마련해주시려고 그토록 애쓰시던 우리
《진석동무!》
선경은 젖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난 인간으로서 머리를 쳐들수 없었소. 난 맹세만 다지고 실천하지 못한 자신을 저주하며 뒤늦게나마 분발하려 했소. 동무의 오해도 샀지만 언젠가는 동무가 나를 리해하여주리라 믿으며 농촌으로 갔던거요.》
선경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진석의 팔을 잡아흔들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편지로라도 알릴수 있지 않아요?!》
진석은 고개를 힘겹게 쳐들었다.
《다 모든것이 다 지나간 일이요, 난 그때 변명할 용기조차 없었소.》
그 말은 사실이였다. 오직 철저한 실천만이, 빈말아닌 결사관철만이
《고통도 많았고 고민도 많았지만 민족의 운명을 걸머지신 우리
갈린 목소리로 절절하게 뇌이는 진석의 두 눈이 보석처럼 번쩍거렸다.
《농장숙소의 텔레비죤화면에서 동상으로 올라가는 사람들(동무의 모습도 보았소.)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이곳으로 달려오고싶어했는지 동무는 모를거요. 그러나 … 빈손으로
진석은 힘있게 머리를 들었다.
《내 어릴적 소년단시절, 그때는 이 세상 모든것을 다 드리고싶었던 우리
그들은 어느덧 천리마동상을 지나 모란봉기슭을 따라 걷고있었다.
《그동안 단 한번만이라도 찾아왔더라면…》
선경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진석은 만수대쪽을 향하여 돌아섰다. 그리고 몇걸음 내디디였다.
《나는 우리
선경은 자석에 끌리듯 그와 발걸음을 나란히 맞추며 그의 마음을 따라 걷고있었다. 전에없이 아름다와진 평양의 밤거리를…
그때로부터 한달후.
중앙텔레비죤에서는 보도시간을 통하여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청년발명 및 과학기술전시회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우리 나라 대표단의 도착소식을 알리고있었다.
일행중에는 전시회에서 최우수상인 금상을 수여받은 진석이도 있었다.
일행은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만수대동상을 찾았다.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잊을수 없는 위대한 은인의 거룩하신 영상이 영예를 떨치고 돌아오는 슬기로운 전사, 참된 제자들을 반겨맞아주었다.
향기그윽한 꽃들로 정히 엮은 꽃다발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