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지고있는 우리 민족은 중세에 이르러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하여놓았다. 우리 선조들이 창작한 문학작품들가운데는 15세기의 농민생활, 농촌생활을 진실하고 생동하게 반영한 시가묶음 《농부의 노래》도 있다.
《농부의 노래》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이며 학자였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이 창작한 시가작품들이다.
강희맹은 자를 경순(景醇)이라 하고 호를 사숙재(私淑齋)라고 하였다.
강희맹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열중하여 이름난 문인으로 되였다. 사람들은 그의 글재주와 학식을 높이 평가하여 강희맹을 당시에 문장가들로 알려졌던 한계희, 로사신과 함께 《3걸》이라고 하였다.
강희맹의 가정은 대대로 농학에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 강석덕과 할아버지 강회백, 증조할아버지 강시 등은 모두 이름난 농학자들이였다.
강희맹은 이러한 가정의 영향을 받아 농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농민들의 생활과 농사일을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이에 기초하여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농학책을 저술하였다.
《금양잡록》은 금양(衿陽) 즉 경기도 시흥지방의 농사관계의 자료들을 기록한 책으로서 이 지방에서 심어가꾸던 벼, 콩, 조 등 82종의 작물의 생리적특성과 재배경험을 소개하고 당시의 영농방법과 자연현상이 농사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적인 체험과 농민들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해설하였으며 종자선택, 적지적작 등 농사에서 나서는 절실한 문제들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15세기 우리 나라에서의 영농방법, 농업기술, 농촌생활을 리해하는데 귀중한 참고로 된다.
《금양잡록》에는 마지막에 당시 시흥지방의 농민들속에서 전해지던 노래 14편을 한자시형태로 정리하고 《농구》(農謳)라는 표제로 소개하였다.
《농구》란 《농부의 노래》 또는 《농가의 노래》로 해석할수 있다. 그러나 시가작품에서 이야기되는 생활은 주로 농부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농사집의 생활을 노래한 리원배의 《전가음》(田家吟) 즉 《농사집의 노래》와 대조를 이루므로 《농구》는 《농부의 노래》로 리해된다.
《농부의 노래》는 농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있으면서 한문에 능하였던 강희맹이 진지하게 탐구하고 정력적으로 창작한 결과에 이루어진 시가작품으로서 중세 우리 나라의 농민생활, 농촌생활을 진실하고 생동하게 보여준 시가문학유산이다.
위대한 령도자
《찬란한 문학예술유산을 가지고있는것은 우리 민족의 크나큰 긍지이며 민족문학예술을 끊임없이 개화발전시켜나갈수 있게 하는 귀중한 밑천으로 된다.》(《
선조들이 창작하여놓은 우수한 시가문학유산은 우리 민족의 뛰여난 슬기와 재능, 풍만한 감정과 정서를 보여주는것으로 하여 우리들에게 커다란 민족적긍지를 안겨준다.
《농부의 노래》는 15세기에 창작된 우수한 시가문학으로서 자못 큰 인식교양적가치를 가진다.
1491년에 《금양잡록》을 처음으로 출판하면서 쓴 조위(曹偉, 1451-1503년)의 발문에 의하면 강희맹은 겨를이 있을적마다 금양으로 가서 나무를 심고 곡식을 가꾸면서 농사에 대한 일을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 농부들의 노래도 들을수 있었는데 그것은 항간의 다른 노래들과 구별되는 《비장》한 곡조였다. 강희맹은 이에 감동되여 마침내 한자시형태로 그것을 정리하였다. 곡은 전해지고있지만 가사가 없던 《이슬받이》, 《해맞이》를 강희맹은 곡상에 맞추어 새로 창작하였으며 어떤 노래는 가사는 있지만 제목이 없어서 가사의 내용을 참작하여 제목을 새로 만들어 붙이기도 하였다.
《농부의 노래》 14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여진다. 그것은 당시 농민들이 오전에 부르던 노래와 오후에 부르던 노래이다.
두 부류의 노래들은 곡조와 창법이 서로 달랐다. 14편의 노래들가운데서《이슬받이》(捲露), 《해맞이》(迎陽), 《호미들고》(提鋤), 《김매기》(討草 《농부자랑》(誇農), 《서로 권하네》(相勸), 《비가 오나 개이나》(雨陽若), 《점심밥 기다리세》(待饁)는 오전에 부르던 노래로서 곡조는 느린가락 즉 《만조》이며 《배를 두드리세》(扣腹), 《가을이 온다》(望秋), 《긴사래》(長畝), 《물닭이 운다》(水鷄鳴), 《지는 해 산에 걸렸네》(日啣山), 《발씻기》(濯足)는 오후에 부르던 노래로서 곡조가 잦은가락 즉 《촉조》이다. 그리고 느린가락에는 《히응아야리》(屎應阿也利)라는 조흥구가 있었고 잦은가락에는 《확자고로농》(確者古老農)이라는 조흥구가 있었다.
발문에서는 이러한 조흥구가 마을사람들이 서로 부르고 화답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이미 신라때로부터 노래의 마감에 붙이던것이라고 하였으며 전통적인 조흥구로서 《농다리온 지리다리야》(農多利乎地利多利也)를 실례로 들었다.
《농부의 노래》에서 당시 농민들이 부르던 노래의 가사와 곡조, 창법과 조흥구 등을 소개한것은 매우 가치있는 자료이다.
《농부의 노래》에서 내용상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벌어지는 농사일의 진행과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가운데서 《이슬받이》, 《해맞이》, 《호미들고》, 《김매기》는 아침나절에 진행하는 농사일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른 아침 호미 들고 밭에 나가니
이슬은 방울방울 상기 아니 개였구나
우리네 곡식들만 잘 자란다면
내 옷이 젖는다 걱정을 하랴
(《이슬받이》)
淸晨荷鋤南畝歸
露溥溥猶未晞
但使我苗長
厭浥何傷沾我衣
산머리에 해 방금 솟아오르니
푸른 벼모 손벽같이 잎이 폈구나
해볕아래 밭에서 김을 매여라
귀한 곡식 날마다 잘 자라게
(《해맞이》)
山頭初日上
綠秧齊葉平如掌
迎陽下田理荒穢
嘉穀日日長
호미 들고 술병을랑 잊지 말아라
술병은 김매기를 위한것이니
한해농사 풍년흉년 김매기에 달렸거니
김매기 어이 감히 게을리 하랴
(《호미들고》)
提鋤莫忘提酒鍾
提酒元是提鋤功
一年饑飽在提鋤
提鋤安敢慵
저 가라지 참말로 벼를 닮았네
보고봐도 못가리여 늙은이 시름짓네
풀일랑은 말끔히 뽑아버리소
그러면 가라지도 없어질테니
(《김매기》)
彼莨莠與眞同
看看不辨愁老翁
細討非類莫相容
盡使莨莠空
노래에서는 이른 아침 찬 이슬에 옷이 젖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생활과 풍년을 기대하며 김매기에 힘을 들이는 농부들의 모습을 생활적으로 진실하게 그려보이였다.
한편 《긴 사래》, 《물닭이 운다》, 《지는 해 서산에 걸렸네》는 오후에 진행되는 농부들의 생활을 보여주고있다.
긴 사래 다투는데 김 정말 성했구나
뙤약볕은 등 지지고 비지땀은 흐르는데
형님은 동생보다 힘이 약하니
앞뒤를 다투느라 손발 바쁘다
긴 사래 다투면서 형님을 돌아보며
웃고있구나
동생이 김 잘 매니 형님은 부끄린다
긴 사래 다투는데 김 정말 성했구나
(《긴 사래》)
竟長畝畝正荒
日煑我背汗翻漿
大郎不及小郎强
咫尺手脚忙
竟長畝回頭笑大郎
大郎去慚小郎强
竟長畝畝正荒
물닭이 운다 잔을 들어라
아침닭 자주 울어 몇잔을 들었더니
주린 창자 덥혀주더라
저녁닭이 운다
술 어찌 이토록 늦게 거르나
물닭이 운다 잔을 들어라
(《물닭이 운다》)
水鷄鳴當擧卮
朝鷄累數卮
已擧醺人飢
晩鷄忽已報
釃酒水何遲
水鷄鳴當擧卮
지는 해 바라보니 산에 걸렸네
저녁이슬 갓 돋아 잎에 맺혔다
호미를 거두어서 허리에 차고
마을로 돌아가자 새들과 함께
(《지는 해 서상에 걸렸네》)
回看斜日已啣山
夕露微升凝葉端
捲却長鋤插腰間
行趁村墟待鴉還
작품들은 뜨거운 해볕아래 김을 매면서도 늦어오는 저녁볕마저 아끼면서 일하는 농부들과 해질무렵 시장기를 없애고 피로를 풀기 위해 음식을 기다리는 농부들의 심정 그리고 늦은 저녁 일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그림처럼 생동하게 펼쳐보이고있다.
이처럼 《농부의 노래》는 농사일에 힘을 들이는 중세 우리 나라 농민들의 생활을 잘 그려보이고있다.
《농부의 노래》에는 또한 중세 농민들의 고달픈 생활형편을 노래한 작품들이 들어있다.
중세 우리 나라 농촌에서의 농민들의 생활은 실로 고생스러운것이였다. 봉건통치배들과 지주들의 착취로 말미암아 목숨을 이어가기조차 어려운 처지에서 농민들은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가꾸었다.
《농부의 노래》에서 《점심밥 기다리세》, 《발씻기》는 중세 농민들의 힘겨운 로동과 고생스러운 생활의 일단을 보여준다.
큰애긴 절구질에 마음 급한데
작은애긴 부엌에서 불을 지피니
내굴이 하늘에서 가물거린다
주린 배 우뢰 울고 두눈에선 불꽃인다
점심밥 기다리세
호미질도 이제는 기력 없으니
(《점심밥 기다리세)
大姑舂政急
小姑入廚烟橫碧
飢膓暗作吼雷鳴
空花生兩目
待饁時
提鋤不得力
발 씻어도 깨끗이는 씻지 말아라
집에 돌아가 눈 붙이니 닭이 홰친다
닭이 홰를 치면 또다시 호미 쥐니
열두때를 어느 때면 다리를 펴랴
여름밤 짧으니 얼마나 쉴가
발을 씻어도 깨끗이는 씻지 말아라
(《발씻기》)
濯足不用十分濯
還家瞌眼鷄咿喔
鷄咿喔鋤還握
十二時何時可伸脚
夏夜短休幾刻
濯足不用十分濯
노래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들에서 일을 하던 농부가 점심을 기다리는 심정과 늦은 밤에야 방에 들어와 자리에 눕게 되는 생활을 보여주고있다.《주린 배 우뢰 울고 두눈에선 불꽃이는》 지경에 이른 농부들에게 제때에 가져다줄 음식이 없어서 급기야 절구질을 하는 녀인의 모습이 눈물겹게 안겨오며 눈을 붙이자 닭이 홰를 치고 닭이 울면 또다시 호미를 쥐여야 하는 농민들의 고달픈 생활이 진실하게 그려졌다. 하루 열두때를 쉬임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도 굶주림과 헐벗음에서 벗어날수 없었던것이 바로 중세 우리 나라 농민들의 생활이였다.
《농부의 노래》에는 또한 고생속에서도 가을을 하고 한때 즐거움을 누리는 농민들의 생활을 노래한 작품들이 있다.
중세 우리 나라 농민들은 고된 로동속에서도 가을이 되면 한때의 즐거움을 맛보군하였다. 《농부의 노래》에는 우리 나라 중세 농민들이 가을철에 누리게 되는 락천적이고 다감한 생활정서를 반영한 작품들이 있다.
광주리에 담아놓은 보리밥 풋나물은
숫가락에 흐르도록 매끄럽고 맛이 단데
아이 어른 모여와 차례로 앉아서는
사방에서 떠들썩 그 맛이 좋다 하네
한번 배불리고 기운을 돋구리라
배를 두드리니 기쁨이 넘쳐나네
(《배를 두드리세》)
麥飯香饛在筥藜
美甜滑流匕
少長集次第止
四座諠誇香美
得一飽撑脰裏
行扣腹便欣喜
보리가을 끝내고서
한해농사 가늠한다
우리 곡식 잘 됐으니
다른 페해 없었으면
낮은 밭은 누르렀다
수레 가득 나르리라
짐승을 잡아놓고
만수무강 잔을 드세
(《가을이 온다》)
麥登場
占年祥
我家穰
願無傷
汚邪黃
滿車箱
殺羔羊
稱壽觴
작품들은 올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즐기는 농민들의 생활과 풍요한 가을을 바라는 농민들의 소망을 노래하고있다. 춘궁기에 다달아 고생을 하다가 보리가 익으면 그것으로 연명을 하면서 다시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는것이 중세 농민들의 생활이였다. 노래에는 보리밥에 풋나물음식일망정 온 가족이 한 때를 배불리고 즐기는 중세 농촌생활의 정서가 강한 여운속에 안겨온다. 아이, 어른이 한데 모여앉아 보리밥으로 배를 불리면서 새로운 힘을 얻고 즐거워하는 농민들의 얼굴이 금시 눈앞에서 펼쳐지는듯하다.
한편 《가을이 온다》에서는 보리가을을 마치고 한해의 작황에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농민들의 간절한 소원과 풍년을 맞이하면 즐기게 될 그들의 생활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농부의 노래》에서는 중세 우리 나라 농민들이 누리게 되는 가을철의 생활을 보여주고있다.
《농부의 노래》에는 또한 비록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농사를 짓는 생활을 긍지를 가지고 대하는 농민들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들도 있다.
어제 지나오다 장에 들렸더니
장사군들 얼굴이 꽃과 같더라
늙은 농부 추하다고 비웃으면서
저마끔 사치함을 자랑하겠지
늙은이 멈춰서서 말을 하였네
장사군 그만 리속 무얼 뽐내나
긴 돈꿰미 값진 보물 생각해보게
그걸 다 우리 농군 만들어냈지
(《농사군자랑》)
昨從市中過
市中諸子顔如花
爭來嗤老醜
各自逞奢華
老夫拄杖語市人
刀錐末利安肯誇
長金積玉細商量
皆自吾農家
내 한몸 아까울것 전혀 없다네
내 한생 한순간에 불과하거니
온 한해 편안하길 바란다지만
편안하면 먹을것이 부족하다네
괴로움을 참으면서 부지런하세
권농사 찾아와서 재촉할테니
(《서로 권하네》)
我身足可惜
我生駒過隙
豈厭終歲坐安閑
安閑食不足
勉勤苦
田畯來相促
노래에서는 농사를 하는 농부의 생활을 긍지높이 자랑하면서 부지런히 일할것을 권고하고있다.
사회에서 창조되는 온갖 물질적부가 농민들의 농사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한몸의 안일을 바라지 않고 근면하게 일하는 중세 우리 나라 농민들의 성품과 념원을 일정하게 반영하였다.
이상과 같이 《농부의 노래》는 15세기 우리 나라의 농민생활, 농촌생활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강희맹의 《농부의 노래》는 우리 나라 중세 한자시의 한 부류인 악부시(樂府詩)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악부시란 민간에 전해지는 노래를 한자시형태로 기록해놓은것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악부시의 창작은 매우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악부시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문인은 리제현(李齊賢, 1287-1367년)이였다.
리제현은 14세기에 당시 인민들속에 널리 전해지던 노래를 한자시형태로 기록하고 그것을 《소악부》(小樂府)라고 하였다.
리제현의 《소악부》는 우리 민족생활을 반영한 노래를 7언시형태로 기록한것이다. 《소악부》에서는 민간노래가 담고있는 사상주제적내용은 대체로 옮겨놓았으나 인민가요로서의 노래의 형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한자시의 형태상 특징에 엄격히 구애되여 기록하다보니 어떤 작품은 노래의 내용까지도 일부 왜소화하였다.
강희맹은 리제현보다 100여년후에 생존한 문인으로서 리제현처럼 민간가요를 한자시형태로 기록하면서도 한자시의 고유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강희맹은 당시 농민들이 부르던 노래의 가락에 맞추어 시를 짓거나 혹은 농민들이 부르던 노래를 기록하면서 그 내용을 잘 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시형식은 한자시의 고유한 형태인 5언시나 7언시, 절구나 률시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장단구, 잡언체를 리용하였다. 이것이 민간노래를 한자시형태로 옮긴 악부시로서 리제현의 《소악부》와 강희맹의 《농부의 노래》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실례로 강희맹은 시 《긴 사래》를 7행으로 이루어진 장단구로 만들었다. 한자시의 고유한 형태에서는 7행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강희맹이 농민들속에서 불리우던 노래인 《긴 사래》를 기록하면서 구태여 7행시의 형식을 취한것은 노래의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였기때문이다. 강희맹은 이처럼 고유한 한자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7행시를 지으면서 압운법도 독특하게 리용하였다. 《긴사래》에는 일곱개의 행마다 모두 압운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한자시는 련마다 압운하는것을 원칙으로 한다. 리제현의 《소악부》는 네개의 행으로 이루어진 절구의 형태로서 매련의 마지막에 압운을 하였다.
그러나 강희맹은 《김매기》, 《배를 두드리세》, 《가을이 온다》,《물닭이 운다》, 《발씻기》, 《지는 해 산에 걸렸네》 등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매 행의 마지막에 운을 달았다. 《지는 해 산에 걸렸네》는 네개의 행으로 되여있어 얼핏보면 마치도 한자시의 7언절구같이 보이지만 행마다 압운을 하였기때문에 절구와는 구별되게 하였다.
이처럼 매개의 행마다 압운을 한것도 강희맹의 시가작품이 가지고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강희맹이 시의 행마다 압운을 한것은 전체적으로 시가작품의 운률을 살려주기 위한데도 목적이 있지만 우리 나라의 민간가요를 기록한악부시를 일반 한자시와 구별하려는데도 목적이 있었다.
강희맹은 《농부의 노래》에서 시적운률의 조성방법도 한자시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한자시의 운률은 압운과 함께 시행의 음절수를 4. 3또는 2. 3으로 만들어 이룬다. 균여(923-973년)는 《시》 즉 한자시의 음수률을 《5개의 말마디, 7개의 글자》(詩搆唐辭 磨琢於五言七字)로 특징지었다. (《균여전》제8 《역가공덕분자》). 다시말하여 한자시의 한 행은 5언 또는 7언이 전형적인 형태라고 보았다.
우리 나라에서 과거제도가 실시되고 한문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봉건통치배들속에서 한자시창작이 극히 장려되던 시기에 균여는 우리 말 노래와 구별되는 한자시의 특징을 글자수, 음절수에서 찾아보았던것이다.
리제현의 《소악부》는 전일적으로 한자시의 7언절구형식을 리용하였다. 그리하여 시행은 모두 일곱글자이며 그의 음수률은 균일하게 4, 3이였다. 리제현은 자기의 악부시작품들을 4, 3의 음절수로 이루어진 네개의 시행으로 창작하였던것이다.
그러나 강희맹은 이러한 한자시의 운률조성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실례로 《호미들고》는 4행으로 된 시이지만 음절수가 7, 7, 7, 5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농사군자랑》은 5, 7. 5, 5. 7, 7. 7, 5의 음절수로 구성된 8행시이며 《물닭이 운다》는 3, 3. 5, 5. 5, 5. 3, 3의 음절수로 된 8행시, 《발씻기》는 7, 7. 6, 8. 6, 7의 음절수로 된 6행시이고 《가을이 온다》는 3언구 8행시이다.
강희맹이 이처럼 농민들속에서 전해지던 노래를 한자로 기록하면서 한자시의 고유한 현태상 특성을 따르려고 하지 않은것은 내용을 충실히살리려는 창작적의도와 함께 한자시와 구별되는 우리 나라 민간가요의 특성을 고려하였던 사정과 중요하게 관련된다.
우리 나라에서 중세에 창작된 한자시는 주로 읊기 위한것이였고 민간가요의 가사는 곡에 따라 부르기 위한것이였다.
중세 우리 민족의 노래는 고유한 음률상의 특성을 체현하고있다. 우리 민족의 노래로 불리워지는 가락에 한자시형태의 가사는 전혀 어울릴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자시형식의 《시》와 우리 민족의 노래로서의 《가》를 엄격히 구별하였던것이다. 실례로 균여는 《시는 한자말로 구성하》고 《노래는 우리 말을 배렬한》다고 하였으며(《균여전》제8《역가공덕분자》) 홍량호(1724-1802년)는 자기가 창작한 한자시와 우리 민족의 노래를 기록한 악부시를 구별하기 위하여 악부시에는 《가요》라는 표제를 달았다.(《이계집》 권1) 이것은 균여나 홍량호가 한자시와 우리 말 노래의 가사를 서로 다른것으로 구별하여보았다는것을 말해준다.
강희맹은 한자시와 우리 민족의 노래가 엄격히 구별되는 특성을 가진다는것을 파악하였기때문에 농민들속에서 불리우던 노래를 기록하면서 한자시의 고유한 형식을 따르려 하지 않았던것이다.
강희맹의 악부시 《농부의 노래》에는 당시의 시대적제한성과 작가의 세계관적제한성 등으로 하여 생겨난 일부 부족점도 있다.
《농부의 노래》는 우선 내용에서 부족점을 가지고있다.
시 《비가 오나 개이나》에서는 농사일이 순조로운것은 《임금의 덕》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성행하였던 봉건적충군사상을 반영하였기때문이다.
《농부의 노래》에서는 그토록 귀중한 농사일이 고달프고 애써 일하는 농부들의 생활이 몹시 어렵다고는 하였으나 그것이 어떤 원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현상인가 하는데 대하여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작품들에서는 그저 《괴로움을 참으면서 부지런하게》일을 하라고 하거나 《발을 씻어도 깨끗이는 씻지 말》고 밤에 낮을 이어 일할것만을 강조하고있다.
《농부의 노래》는 또한 형식상에 있어서도 부족점이 있다.
《농부의 노래》가 비록 우리 나라 민간가요의 내용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한자시의 형식을 그대로 리용하지 않았지만 우리 민족의 노래를 한자로 기록한것으로 하여 내용을 완전히 옮길수 없었으며 형식에서 우리 민족가요의 형태상 특성을 원만히 살려낼수는 없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하여야 할것은 조흥구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다.
《농부의 노래》의 발문에서는 당시 민간가요의 마지막에 붙은 조흥구인 《지리다리야》, 《고로농》등을 한자로 표기하고 그것을 한자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지리다리야》를 《리속을 일컬으는것》으로, 《농사를 찬양하는 말》로 인정하였으며 《고로농》을 《옛날의 사리에 밝은 농군》의 뜻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은 우리 말로 된 조흥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민족의 노래들에는 흔히 조흥구가 있었다. 고려시기의 가요들을 실례로 들어보더라도 《청산별곡》에서는 《얄리얄리 얄랄성 얄라리 얄라》, 《서경별곡》에서는 《위 두어렁성 두어렁성 다링디리》, 《사모곡》에서는 《위 덩더듕셩》, 《가시리》에서는 《위 증즐가》등의 조흥구가 리용되였다. 이것은 고유한 우리 말이며 한자말이 아니다.
그러나 《농부의 노래》에서는 우리 말로 된 조흥구를 한자말로 리해하고 풀이하였던것이다. 고려가요에서 《다링디리》, 《얄라리 얄라》는《농부의노래》에서 《지리다리야》와 어음적으로 매우 류사하다.
이와 같이 《농부의 노래》의 발문에서 조흥구를 한자말로 인정하고 해석한것은 잘못이였다.
강희맹의 악부시 《농부의 노래》는 이러한 제한성과 부족점이 있지만 담고있는 내용으로 보나 형식으로 보아 우리 나라 중세문학유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농부의 노래》는 소재의 측면에서나 주제사상적내용에서 그리고 시가형식의 측면에서 15세기 우리 나라 악부시를 대표할수 있는 작품이다. 《농부의 노래》는 우리 나라 중세 악부시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것으로 하여 의의가 있다.
강희맹의 《농부의 노래》는 농민들의 생활을 반영한 민요를 소재로 악부시를 창작하였는데 그 생활반영의 폭이 넓고 다양하다. 중세 로동가요를 가지고 악부시를 창작하기는 강희맹이 처음이였다.
강희맹은 악부시를 창작하면서 시형식에 구애되여 우리 나라 민간가요의 내용을 조절한것이 아니라 내용을 충분히 전하기 위하여 한자시의 형태를 대폭 변경시켰다. 강희맹이 리용한 악부시의 이러한 형식은 그후 홍량호와 리학규 등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였다.
홍량호의 악부시 《청구단곡》, 《북새잡요》와 리학규의 악부시 《령남악부》는 《농부의 노래》처럼 한자시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창작되였다.
이상과 같이 민족고전 《금양잡록》에 수록된 강희맹의 시묶음 《농부의 노래》는 중세 우리 민족이 창조한 시가유산으로서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